산행의 이유

 

산이 거기에 있어 그곳에 간다

 

글 사진 · 김재은((사)행복플랫폼 해피허브 대표, 대한민국 행복디자이너)

 

 

다짜고짜 이 말부터 해야겠다. 난 결코 전문 산악인이 아니다. 히말라야 8000미터 고봉들, 아프리카 킬리만자로나 남미의 아콩카구아 같은 대륙 최고봉은 물론 이렇다 할 세계의 산들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고작해야 지리산이나 설악산 등에 오르면서도 헐떡이는 장삼이사일 뿐이다.

다만 어떤 산에 오르더라도 그냥 그대로 즐기는 습관이 있다는 게 전부다. 영국 산악인 조지 말로리는 ‘산이 거기에 있어 그곳에 간다’라고 말했다. 나는 조지 말로리의 신봉자인지도 모르겠다. 산이 그저 좋아 틈만 나면 산에 오르니 말이다.

감히 작은 용기를 내어 이 글을 쓰는 이유가 있다. 국토의 70%가 산악지형인 대한민국에서 산이 주는 엄청난 혜택을 많은 사람이 함께 누렸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갈등과 스트레스가 가득한 현대의 삶 속, 진정한 치유와 행복의 길이 산에 있다.  

 

온전히 깨어있는 삶

2007년 가을이었을 것이다. 나도 이제 산에 다녀야겠다는 마음으로 친구들과 의기투합했다. 그때까지는 ‘나이가 들어야 산에 가는’ 이해가 잘 안 되는 관행이 발목을 잡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첫 산행지로 청계산에 올라가는 데 얼마나 힘이 들던지 ‘다음엔 절대로 산에 가지 말아야지’하는 다짐이 절로 일어났다. 이리 힘든 일을 앞으로 계속해 나갈 생각을 하니 더욱 그랬다.

그런데 그 후로 십수 년이 지났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다짐은 지켜지지 않았다. 왜 그때 이후로 멈추지 않고 산을 계속 찾게 되었을까. 돌아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산에 오르는 것이 그냥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반드시 땀을 흘려야 하고 시간 속의 고통을 인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저 얻는 것을 싫어하는 삶’의 철학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래서 폴란드 산악인 보이테크 쿠르티카가  ‘등산은 인내의 예술이다’라고 말을 했나 보다. 산에 오를 때 왜 인생 내공이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요즘은 산린이(산을 찾는 젊은 사람들)들이 많아져 그런 의미에도 변화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견디고 올랐을 때 산마루나 정상에서 만나는 풍광, 거기에 불어오는 바람에 한 줄기에 땀을 식힐 때 밀려오는 상쾌함과 성취감, 행복감은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생각해보니 산에 오르는 것은 그대로 농부 정신의 체감인 듯하다. 씨를 뿌리고 풀을 매고, 장마와 땡볕을 이겨내며, 견디고 버티고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농군이야말로 산에 오르는 것과 많이 닮았으니.

앞만 보고 달려 나온 삶에서 벗어나 주위의 나무나 숲을 돌아보고, 풀벌레나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뚜벅뚜벅 걸어가다 보면 순간순간 온전히 깨어있는 삶과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이보다 더 가슴 뛰고 즐거운 시간이 어디 있으랴. 때론 숨이 가빠오지만 이보다 더 살아있다는 증거가 어디 있으랴. 

 

우리가 산을 오르는 이유

그런데 이런 어마어마한 것들을 얻고 누리는 등산이 언제부터인가 조금 다른 의미로 변질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등산이 과시와 자랑, 명예의 수단이 되다 보니 때로는 생명의 소중함까지 무시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거의 쉬지 않고 1년도 안 되어 100대 명산을 오르기도 하고, 초보산행으로 하루 만에 지리산 종주나 설악산 공룡능선에 도전하는 만용을 부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이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부추기며 그러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분위기도 있어 어이가 없고 안타깝기도 하다.

이렇듯 생명의 안전은 차치하더라도 ‘앞만 보고 달려온 삶’을 그대로 산으로 옮겨온 것 같은 일등주의 엘리트 등산 문화가 그리 편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러다 보니 우리가 왜 산에 오르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 같기도 하다.  

몇 해 전 8월 지리산에 올랐을 때 어찌하다 보니 세석 대피소에서 한나절을 머물게 되었다. 무조건 걸어야 한다는 강박이나 선입견과는 다른 상황이 조금은 어색했지만 세석평전의 야생화를 만나고, 낮잠도 잘 수 있었다. 뜻밖의 행복, 세렌디피티가 따로 없었다.

지난 8월 말은 엄중한 코로나 상황이었지만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고자 지리산 천왕봉에 무박으로 간 적이 있었다. 백무동에서 장터목까지는 무탈하게 갔는데 거기서 천왕봉에 가려 하니 일기예보와는 달리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여기까지 왔는데 안전의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해볼까 하는 유혹이 넘실댔지만 결국 제석봉 언저리에서 돌아섰다. 안전을 무시한 그 어떤 성취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려오는 길에 만난 파란 하늘이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 선택은 잘한 것이라 믿고 싶다. 산악인 존 뮤어가 말했듯이 ‘인간이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산이 인간을 허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산행의 완성

이렇듯 산행이란 인생길처럼 성취감 못지않게 때로는 아쉬움을 안고 살아가는 여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처럼, 내 욕심처럼 모든 것을 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이 정도로 충분하다’라는 만족감의 인식이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시도조차 안 하거나 중도 포기를 권장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무리함이 화를 불러올 수 있음을 잘 새기자는 것이다. 산에 오르는 데 필요한 것은 힘들지만 기꺼이 도전하는 진정한 용기이지 결과에 집착하는 교만과 만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산이 있어 그곳에 간다(Because it's there)”는 명언을 남긴 조지 말로리는 “정상은 내려오고 나서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 그전에는 진정으로 오른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무사히 집에 도착했을 때 산행은 완성되는 것이라는 것, 마음에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산도 인생도 정상에 올랐지만 하산길이나 인생 2막에 어려운 일을 겪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까 말이다.

정상에 섰다는 우쭐대는 마음이 교만함과 긴장감의 해이로 이어져 내려올 때 무탈한 산행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산의 정상도 인생길도 언젠가는 내려와야 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정상의 시간은 짧고, 다른 시간들은 그보다 훨씬 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떤 생각으로 산에 오르고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는 분명해 보인다.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뉴질랜드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가 말했다. 우리가 정복한 것은 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고. 그리고 “자신과의 싸움을 위해 산을 오르는 것은 괜찮지만, 남을 이기기 위해 산에 도전해서는 안 된다”라고. 산악인 알랑 드 샤뗄리우스는 말했다. “등산은 길이 끝나는 데서 시작한다”라고. 폴베이 사르는 “온갖 일들이 규칙적으로 묶여 있는 오늘날, 우리 생활 속에 남아있는 일시적으로나마 완전한 자유로운 삶의 방식 중의 하나가 등산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렇다. 등산은 삶에 자유를 선물하는 최고의 도우미다. 물론 거기에 땀과 용기, 그리고 인내가 필요하겠지만.

가을이 무르익었다. 인생의 참맛을 느끼려면 사람의 숲으로 가고, 진짜 가을을 만끽하려면 가을숲으로 가야 한다. 가을이 끝나기 전, 가을 산, 가을 숲으로 떠나보자. 내 삶의 자유를 찾으러. 나는 오늘도 산이 있어 산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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